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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목사(높은뜻교회연합 대표목사)는 그동안 통념을 깨는 과감한 행동과 열정적인 설교로 교회 개혁에 앞장서왔다. 2001년 10월 교인 3천 명인 동안교회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높은뜻숭의교회를 개척했고, 대형교회 목회자로서는 드물게 담임목사 세습반대, 사학법 재개정 반대 등 기성 교단을 향해 각을 세우며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청년들에게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킨 그의 설교는 <복음과상황>에서 고지론, 청부론 등의 이름으로 논쟁을 촉발시켰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높은뜻숭의교회(서울시 중구)는 2008년 말 4개의 교회로 분립했다. 출석 교인 약 5000명인 대형교회를 재정 인사 행정이 독립된 네 개의 교회로 나눈 것이다. 분립의 규모와 과정에서 사회적인 반향이 컸다. 교회 밖에서는 교회의 대형화에 안주하지 않는 과감한 결단이라고 환영하는가 하면, 분립 절차상의 문제제기를 하거나 지교회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김동호 목사는 1월 30일, 본지 발행인 김회권 목사와 대담하면서 “교회 분립은 오래 전부터 추진해 온 ‘보이지 않는 성전 건축’ 사업을 지속하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밝혔다. 다음은 대담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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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과 높은뜻숭의교회는 작년 연말에 한국교회와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한창 성장 중인 5000명 규모의 교회를 네 교회로 분립하고 각각 독립적인 담임목회자를 세우는 결단을 한 것인데, 이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요? 분립하시게 된 이유와 과정을 소개해 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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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분립하기까지 과정이 있었지요. 그동안의 우리 교회 히스토리를 알아야 높은뜻숭의교회 분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높은뜻숭의교회의 정관에 따라 교회분립이 이뤄졌습니다. 저희 높은뜻숭의교회가 2001년 10월 7일 정관을 만들면서, 재정의 최소 1/3 이상을 교회 밖으로 쓰자고 정했습니다. 교회분립은 언뜻 이해가 잘 안될지 몰라도 우리 교회가 창립한 복지재단인 ‘열매 나눔 재단’사업과 관련이 있어요. 교회는 이 재단 사업의 일환으로 우선 남산 쪽방촌에 사는 분들을 돕는 사역을 시작했어요. 교회 봉사기관인 이웃사랑회에서 밑반찬을 만들어서 나누고, 청년들은 한 달에 한 번 쪽방을 도배하고 어린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고 눈썰매장도 데리고 갔어요. 쪽방에서 자는 사람들은 하루 6,7천 원 내고 잠을 잡니다. 쪽방에 거주하는 사람이 자기 통장에 300만 원 저축하면 700만 원을 대출해 주기로 했어요. 그렇게 1000만 원으로 전세를 얻으면, 1000만 원은 자기 돈이 되고 방은 공짜로 사는 셈이 되는데, 그 분들 형편에 300만 원을 모아 내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그래서 교우들이 쪽방탈출헌금을 하나님께 드렸어요. 150만 원 모은 사람을 우리교회가 돕자고 한 거지요. 교우들의 뜨거운 호응이 있었습니다. 헌금으로는 대박이 난 헌금입니다. 상상을 초월하게 나왔지요. 밥술이나 먹는 사람들은 한 사람 책임진다고 150만 원을 냈어요. 그런데 탈출을 시키면 뭐해요? 자활을 못하니 먹고 살 게 없는데. 그래서 포장마차라도 하게 해 주자고 300만 원 씩 빌려주는 밑천나눔운동을 시작했죠. 그런데 이것도 성공하지 못했어요.

그 다음으로 김밥천국과 이동식 세차 사업을 했어요. 12명을 모아서 6천만 원을 대출해서 사업장을 하나씩 만들었지요. 이 사업은 성공했어요. 이 사업은 서울 중구청의 자활후견사업으로 선정됐고 중구청에서 매달 70여만 원을 후원했습니다. 저희가 운영하는 사업이 중구청 자활센터들이 운영하고 있는 사업 중에 1등과 3등의 우수자활 사업으로 선정됐어요. 그렇게 중구자활센터를 통해서 크든 작든 매달 월급을 받는 사람의 수가 백 명을 넘었습니다. 세차 사업으로 얼마 전까지 노숙자였던 최씨 형제가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 분이 세차장 사장이 되는 날, 우리 모두는 “최 사장!”이라고 부르며 감격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노숙자 한 명을 사장 만들었구나 생각하니 기뻤습니다. 그날 세차 사업장에서 차를 닦는 분들도 열심히 닦으면 나도 사장될 수 있다는 마음을 먹었을 겁니다. 마음에 충격을 받을 만큼 감동이 컸습니다. 우리 교회의 분립은 이런 나눔의 실천연습에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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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나눔재단 사역과 높은뜻숭의교회의 분립이 어떤 점에서 관련이 있습니까? 좀 더 부연설명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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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분립은 이런 우리 교회의 비전과 교회관과 관련이 있습니다. 저는 2007년 1월에 ‘보이지 않는 성전 건축’에 대하여 설교했는데 그 때 천명한 원칙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성전 건축’에 근거하여 열매나눔재단을 설립하고 미친듯 일 했는데, 그해 말에 숭의여전에서 공문이 왔어요. 2008년 말까지 (예배당으로 쓰고 있던 숭의여전 대강당을) 비우라는 거예요. 우리 교회가 열매나눔재단에 출연하기로 한 200억 사회봉사기금을 다 채우기도 전에 예배 처소가 사리질 위기에 놓인 것이죠. 그 순간 나는 ‘이건 보이지 않는 성전 건축에 대한 사탄의 방해’라고 생각했어요.

문제는 예배당을 새로 지으려면 지을 수도 있겠지만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겠다던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상황이 된 것이지요. 처음에는 분립을 생각하지 않고 예배 장소를 찾았는데, 5천 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예배 장소를 구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물론 ‘보이지 않는 성전’ 프로젝트를 뒤로 잠시 미루고 우선 큰 예배처소를 구하면 될 일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내 마음에 하나님이 주신 성경 구절이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리라”는 누가복음 9장 62절 말씀이었어요. 그래서 순서만 바꾸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던 나는 이 말씀을 받고 ‘아 하나님이 이 순서를 바꾸기를 원치 않으시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원칙이 세워진 거죠. 이젠 길바닥에 나앉는 한이 있어도 이 프로젝트는 멈추지 않는다고 결심했지요. 큰 예배처소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성전 건축’을 위해 나눔과 섬김 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자고 결단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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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교회분립은 목사님께서 2007년 초에 설교하신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에 대한 충성심을 시험하는 일종의 하나님의 시험이었군요. 교우들에게 교회분립을 어떻게 제의하고 설득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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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석교인 5000명이 함께 모일 수 있는 큰 예배처소가 없다면 쪼개서 가자고 단순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분립을 생각했고, 성공적인 분립을 하려면 내가 빠져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내가 있으면 교인들이 흩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담임목사인 내가 빠지는 분립 결정은 결과적으로 그게 더 좋은 생각임이 드러나더군요. 하나님이 두시는 바둑 포석은 달랐던 것이지요. 애초에 내가 빠지는 분립은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내가 있으면서 떼어 주는 분립을 생각했었지요. 우리교회 정관에도 있지만 시작할 때부터 5000명이 되면 분립하자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있는 상태에서 분립하는 방식이었지요. 그래서 5년 전부터 이런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교만한 말로 들릴지 모르오나 우리 교회에서 교인들 천 명을 데리고 분립 개척할 사람 4명만 주십시오.” 이번에 우리 교회 교역자들을 살펴보니까 과연 네 교회를 맡을 목사가 있는 거예요.
icon_Q.gif열매나눔재단은 탈북자 장애인 등 소외 계층의 자활을 돕고 있습니다. 어떤 연유로 이런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열매나눔운동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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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대 기독교학과 은사이신 주선애 교수님께서 은퇴하시기 전에 탈북자에게 마음을 쓰셨어요. 그걸 보고 저도 탈북자를 섬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 때가 탈북자가 7000명일 때였는데, 탈북자들이 사회적 적응을 못하고 있었지요. 그 때 주 교수님이 우리가 7000명도 감당 못하면 통일되면 망한다고 하셨어요. 우리가 노숙자 사장 만드는 일을 하고, 교육하고 훈련해서 노하우를 쌓았으니까, 이제는 7000명 탈북자 사역을 하자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2007년 1월 첫 주일날 ‘보이지 않는 성전 건축’에 대해서 설교하고, 5년 동안 200억을 모아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는 사업에 쏟으려고 했어요. 예배당 지을 돈만큼 교인들이 헌금 작정을 해서 200억을 모은 후 세 가지 보이지 않는 성전 기둥을 세우는 데 쓰기로 했어요. 빈민 새터민 자활 사업, 통일 준비, 사람 키우기 등 세 기둥마다 70억씩 쓰자고 한 거지요. 그 첫 사업으로 70억을 들여서 열매나눔재단을 세운 거예요. 탈북자들과 빈민 자활을 위한 재단입니다.

첫 사업으로 열매나눔재단에서 탈북자 자활을 위한 공장을 세웠어요. 박스 만드는 공장인데 작년 5월에 80명을 3개월 교육해서 그 중 23명을 고용했지요. 탈북자들이 적응을 못하는 원인 중 하나는 적은 임금이었어요. 그들은 평균 60만 원을 받고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 박스 공장에서는 세금이나 다른 것 떼고 실수령액으로 124만 원을 줍니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지요. 매달 몇 천만 원 적자가 났어요. 게다가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사회적 기업으로 신청을 했는데, 떨어졌어요. 그 때 “그래도 할래?”라는 의문이 우리 마음을 시험했지요. 사무처장이 너무 낙심했는데, 제가 그에게 내가 앵벌이를 해서라도 도와줄 테니 포기하지 말고 계속하자고 격려했어요. 정부 지원을 6개월 동안 못 받았고, 어음 받았어도 경기가 나빠져서 회수가 안 되는 경우가 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좋아졌습니다. 나라에서 7,80만 원 지원받고 있어서 해 나갑니다.

지금까지 거의 이탈자 없이 결석과 지각도 하지 않고 일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한 사람이 야근을 하고 아침에 출근버스를 놓쳤어요. 그런데 이분이 김포에서 4만 원 주고 택시를 타고 출근해서 일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저 사람 저렇게 만든 것만으로도 수억 원 쓴 거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나는 돈을 따지기 전에 그 사업이 성공했다고 생각했어요.

이 공장이 모델이 돼서 새로운 공장을 또 세웠어요. 열매나눔재단이 3억 5천만 원, 정부에서 3억 5천만 원, SK그룹에서 3억 5천만 원을 출자해서 작년 12월 말에 제2공장을 세웠어요. 나무로 블라인드 커튼을 만드는 공장입니다. 주 5일제 근무하고 시간 외 수당을 주고 평균 150만 원 이상씩 받을 수 있는 공장인데, 잘 되고 있어요.

또 서울시와 함께 하는 장애인 자활사업을 합니다. 새터민 공장하고 사이즈가 다른 규모의 프로젝트를 맡았어요. 식품을 포장해서 기업에 납품을 하는 일을 맡았어요. 장애인이 앉아서 포장하는 작업을 하고 새터민이 운반을 합니다. 장애인과 새터민이 파트너가 된 일터입니다. 열매나눔재단이 작년 1년 동안 결산한 금액이 42억 원입니다.
icon_Q.gif분립해 간 네 교회의 이름은 각각 무엇이며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그리고 담임목회자로 임명된 분들의 장점에 대하여 한 말씀씩 해 주실 수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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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립한 네 교회는 높은뜻광성교회, 높은뜻정의교회, 높은뜻하늘교회, 높은뜻푸른교회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균등분할이 됐어요. 높은뜻광성교회는 마포에 있는 광성중고등학교에서 현재 1600명 정도 모이며, 담임목사는 이장호 목사입니다.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교수였는데, 이번에 교수직 사임하고 이 교회를 맡았습니다. 그동안 높은뜻숭의교회 당회장 대우를 받는 전임목사로 일했는데, 제 안식년동안 교회를 잘 맡아서 목회한 실력자죠. 높은뜻정의교회는 쌍문동에 있는 정의여자고등학교에서 현재 1800명 모이는데 담임목사는 오대식 목사입니다. 동안교회 전도사로 부임해서 높은뜻숭의교회에서 전임목사로 일했지요. 몇 년동안 일본 동경교회에서 시무했는데, 200명 남짓하던 교회를 1000명으로 부흥시켰습니다.

높은뜻하늘교회는 용인 동백지구에 있고 담임목회자는 이상윤 목사입니다. 이상윤 목사는 동안교회에 있을 때 청년부를 지도했는데, 청년들이 100명도 안 됐을 때 시작해서 1600명으로 성장시킨 목회자지요. 아프리카 선교에 뜻이 있어서 그동안 케냐에서 선교사역을 하다가 이번에 오게 됐지요. 높은뜻교회에서는 유일하게 자기 건물을 가진 교회이지요. 우리가 학교에서 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교회를 다니지 않는 한 교우가 800평(400평 2층)을 사서 리모델링까지 해서 주셨어요. 현재 500명 모이고 있어요.

높은뜻푸른교회는 현재 2200명 정도 모이는데 청년들이 가장 많이 모입니다. 아직 예배처소가 해결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 곳에서 예배하지 못하고 아이들은 청어람에서, 어른들은 문학의 집에서, 청년들은 제법 떨어져 있는 백주년기념관에서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높은뜻푸른교회는 예수전도단 대표인 문희곤 목사가 맡아서 일합니다. 문 목사가 우리교회에서 일을 시작할 때 나는 그에게 상당한 재량권을 주었습니다. 맡은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주중에 교회에 오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문 목사가 주중에는 예수전도단에서 일하고, 대표로 국제회의에 참여할 일이 많아서 일 년에 여러 주일 빠질 수밖에 없는데, 팀 사역을 너무너무 잘 하지요. 이 교회는 문희곤 목사를 담임목사라고 하기는 어렵지요. 팀으로 사역을 하지요. 대표목사인 셈이지요.

나는 분립을 하면 최소한 2000명까지 줄어도 된다고 생각했고, 3000명 남으면 회복할 수 있고, 2000명 줄어도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나더군요. 분립 후 1000명이 늘었어요. 이것은 설명할 수 없는 일이지요. 우리는 넷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넷인 교회를 만들려고 해요. 인사 행정 재정 면에서 모두 독립했어요. 희년운동이나 공동사업을 위해서 교회예산 30% 중앙으로 보내요. 저는 높은뜻교회 연합대표라는 직분을 맡기로 했습니다. 매주 한 교회를 순회하며 설교하다가 일 년에 부활절이나 전교인 여름수련회는 같이 하려고 해요. 저번에 결산을 하기 위해서 공동의회를 한 번 하면서 너무너무 좋았어요.
icon_Q.gif목사님의 30여 권이 넘는 설교집이나 책들을 보면 이번 교회분립은 목회론의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할 것 같은데 교회 분립결정에 대한 회중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요? 회중들의 여러 가지 반응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이렇게 순식간에 교회분립을 성사시켰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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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뜻숭의교회의 회중들은 특성이 있었어요. 5000명이나 출석하는 교회가 어떻게 만장일치가 되겠어요? 하지만 다수의 흐름이라는 게 있는데, 쉽게 말하면 취향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다수의 흐름을 형성한 거지요. 건축헌금하자고 하면 잘 안돼요.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쪽방탈출헌금 같은 것은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지요. 그런 점에서 높은뜻숭의교회는 특별한 회중들이라고 봅니다. 분립을 결정하는 절차에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 위해서 설교도 했고, 당회도 한 번에 결정 못해서 세 번이나 했고, 당회에서 결정한 후에 청문회도 몇 차례 했어요. 성도들이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하기가 두려웠어요. 당회도 3시간 의논하고 무기명 투표해서 결정했어요. 그 다음에 바깥 반응에 대해서는 이제 초연해진 것 같아요. 우리 교회도 나름대로 훈련이 된 거 같아요.

회중들의 반응을 보면서 조금 깨달은 게 있어요. 일을 하면서 우쭐해진 게 있구나 생각했어요. 우리교회 하는 거 괜찮구나 할 때, 섰다고 하는 순간 넘어지는구나 생각한 거죠. 내가 내 설교를 듣다가 깜짝 놀랐어요. 교회분립 결단을 말하면서 너무 흥분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 겁니다. 그래서 그때 설교를 들으면, 나를 좋게 봐주는 성도들은 괜찮겠지만, 우쭐댄다고 판단하는 사람들도 있었겠구나하는 생각도 들어요.
icon_Q.gif목사님의 교회관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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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목회철학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작고 어려울 때 사람들은 대개 교회의 주인이 되려고 하지 않아요. 잘못하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교회가 커지고 힘이 생기면 자꾸 목사나 장로가 교회의 주인이 되려 하고 급기야는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대로 저는 교회의 힘을 쪼개고 분산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어요. 민주주의도 삼권 분립을 원칙으로 하잖아요.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 교회 안에서도 권력을 분립하려고 애썼어요. 예를 들자면 나는 당회만 했고, 제직회는 전임목사가 주관하도록 했지요. 높은뜻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위하여 제일 위험한 사람은 ‘나’라고 생각합니다.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늘 그걸 의식하고 조심하고 준비했어요. 많은 교인들의 반대와 염려가 있었지만 1년 동안의 안식년을 감행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icon_Q.gif영적 감수성 순종 준비 태세를 어떻게 유지하십니까? 영적 감각을 유지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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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억지로 순종하고 나를 꺾고 하겠지만, 지금 내 나이에 그렇게 되면 곤란하지요. 자주 하나님께 순종해 보면 그 순종에서 오는 맛을 음미할 수 있잖아요. 교인 중에 극작가가 한 분 있는데,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사람들이 목사님을 역발상이라고 하지만 목사님은 순발상이지요. 자기들이 역발상인 거지요”라고 했어요. 체면 때문에 억지로 하나님께 순종할 때가 있었지만 순종했을 때마다 보상이 항상 컸거든요. 교회 분립도 그래요. 분립하자고 생각하는 순간 “분립 괜찮네. 내가 빠지는 분립을 해보자”고 생각하니까 눈이 환해졌어요.
icon_Q.gif목사님께서 기득권을 포기하고 사람을 이끄는 지도력을 일으키는, 낙차 큰 자기 하강을 감행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목사님의 목회는 선한 영향력의 열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떤 분에게 선한 영향을 받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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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모교회인 청량리중앙교회 임택진 목사님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요. 임택진 목사님의 은퇴사가 기가 막혀요. “명한대로 일했다고 사례 받겠느냐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이다.” 그 말만 하고 딱 끝내버렸어요. 은퇴한 후에는 교회를 오시지 않았어요. 임택진 목사님이 보여주신 신앙과 목회의 본은 제 일생 따라 다닙니다.
icon_Q.gif열매나눔재단을 통한 복지사역 외에도 목사님께서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위한 운동과 청년지도자 육성에 큰 열의를 보이고 계십니다. 
이 모든 활동을 뒷받침할 수 있는 목사님의 근본적인 신앙적 확신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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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택진 목사님은 제가 삶으로 부딪쳐 신앙과 목회현장에서 직접 모방하고 배운 분이라면, 제가 마음으로 영향을 많이 받은 분은 남강 이승훈 장로님입니다. 통일(해방)을 위하여 기도한 사람도 많았고, 통일을 믿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통일을 위하여 싸운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통일을 준비한 사람은 제가 보기에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강은 통일을 준비한 분이었습니다. 왜정시대 때 남강이 오산학교를 세운 까닭은 통일을 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남강은 통일이 되면 나라가 혼란해 질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이 갑자기 해방이 되면 지도자가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해방 후 나라와 민족을 이끌어 갈 지도자를 세우고 키우기 위하여 오산학교를 세웠던 것이지요. 내가 한반도평화연구원이나 코스타를 섬기는 것도 그런 뜻이지요. 사람 키워야지요.

동안교회에서 목회할 때 처음 1300명이 출석하고 있었는데, 부임 후 1년 만에 부흥하더라고요. 새벽 기도회가 끝나고 혼자서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 ‘이건 네 목회 아니다’라는 말씀을 주셨어요. 제가 ‘그러면 누구 목회입니까?’라고 물었는데, 원로 목사님 목회라고 하시더군요. ‘1300명까지는 원로 목사님 목회라면 그 다음부터 늘어난 것은 제가 와서 늘어난 것이니 제 목회가 아닙니까?’ 그랬더니 ‘너희 원로 목사가 밭을 갈고 씨를 뿌렸기 때문에 네가 거둘 수 있는 것이 아니냐? 네가 와서 거둔 것도 사실은 네 원로 목사 몫이다’고 하셨어요. 저는 그때 목회에는 뿌리는 목회와 거두는 목회가 있는데 하나님께 상 받을 목회는 뿌리는 목회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거두는 데 관심이 없어졌어요. 뿌리는 목회, 그 생각을 많이 했지요. 그러니까 청년들 쫓아다니는 거죠. 통일이 언제 될지는 모르지만 멀지 않다고 봐요. 그러니까 준비해야지요. 탈북자 잘 키워서 그분들 사장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통일을 준비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통일이 돼서 얼마나 혼란스럽겠어요.
icon_Q.gif목사님의 남은 기간 동안의 목회비전은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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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영향을 준 몇 가지 일화가 있어요. 사고뭉치들만 모아서 세운 대안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교 아이들이 정신을 차리고 공부해서 90%가 넘는 학생들이 정규 대학엘 갈만큼 변화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을 그렇게 바꾼 분은 그 학교의 수위 할아버지였어요. 그 분은 은퇴하신 전직 교장 선생님이셨어요. 수위가 교장된 것도 큰 영향을 끼치지만 교장이 수위되면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브라질에 갔을 때 동양선교교회에서 집회를 했었는데 그 교회는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담임목사가 부목사가 되고 부목사가 담임목사가 된 교회였어요. 할아버지 담임목사가 부목사가 되었어요. 자기가 작심하고 키운 부목사를 담임목사로 세운 거지요.

이번에 제가 시애틀로 안식년을 보내러 가서 들었는데, 어떤 목사님이 안식년을 보내러 가셨다가 이민교회에 나가면서 목사라는 신분을 안 밝히고 다녔어요. 아무 소리 안하고 다녔더니 집사를 시켜 주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집사하다가 순장시켜서 순장까지 했어요. 내가 그 교회에 갔을 때 모두들 그 목사님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래서 나도 한번 그런데 가서 숨어서 집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은 기간 동안 이렇게 낮은 곳에서 교장 수위처럼 부목사가 된 담임목사처럼 겸손하게 자신을 숨긴 채 섬기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